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공감 괴물

 

 관심 한번 받아보겠다고 취향에도 맞지 않는 영화들을 보고 있다.

 

 강풀 만화를 원작으로 한 디즈니 플러스 시리즈를 좀 봤다.

 강풀이 각본을 쓴 만큼 그의 감상주의는 별다른 거름망을 거치지 않고 고스란히 적용된 것 같다.

 인물들은 현실적인 깊이를 결여하고 있고 진부한 전형을 답습한다.

 가령 이런 대사를 한번 보자.

 초능력 그게 뭔데? 사람의 진짜 능력은 공감 능력이야. 다른 사람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 그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야.

 엄마가 초능력 있는 어린 아들한테 영웅이랍시고 나대지 말라며 하는 잔소리다.

 유행에 쉽게 휩쓸리는 한국 사회에서 한 차례 유행하고 지나간 훈계다.

 공감 능력은 양날의 검이고, 하늘을 슝슝 날아다니는 정도의 초능력이라면 공감 능력은 아무리 중요해도 두 번째 이하다.

 1. 공감한다는 건 누구 편인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전장에서 적군 머리에 총알을 박고 가슴에 대검을 쑤시는 군인은 자기 등 뒤에 있는 국민들 또는 자기 양옆에 있는 전우들에 공감했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살인을 할 수 있다. 공감 능력이 약하면 대체 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지 스스로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한때 유행한 공감 능력 운운 훈계가 역설적으로 절대 다수의 공감을 얻기는커녕 편을 갈라 한쪽을 적대하는 데 쓰인 것은 바로 그 공감 능력 자체가 지닌 도덕성 때문이다.

 이 한계는 다른 강풀식 샤랄라 감상주의와 함께 전혀 업데이트/반성되지 않은 채 다시 쓰였다.

 2. 초능력이 있다고 해서 영웅은 아니다. 영웅은 사회적 헌신의 서사로 얻는 칭호지 특수한 능력이 있다고 바로 얻을 수는 없다.

 숏트랙 금메달리스트인 올림픽 '영웅' 안현수는 그 특별한 능력을 더 사용하고 추구하고 싶은 나머지 한국 사회를 떠남으로서 영웅 칭호가 폐기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역적으로 몰렸다.

 초능력도 마찬가지다. 입에서 불을 뿜든 하늘을 날든 그 자체로는 영웅의 조건이 아니다. 특정한 범주의 사회에 헌신한다는 서사를 퍼뜨려야 영웅 칭호를 얻을 수 있다.

 그저 초능력을 지닌 상태는 초인이거나 괴물이다.

 영어 Super hero, 즉 한쪽 편에 공감해서 초능력을 휘두르는 초영웅은 공감 괴물의 다른 이름이다.

 공감 능력은 인간의 불가능 속에서 성립한 정치적 능력이지만 공중부양은 몇 가지 불가능을 초월할 수 있게 해 준다.

 당연히 이 경우엔 초능력이 공감 능력보다 중요하다.

 

 굳이 이 대사를 트집 잡는 이유는 그 말을 하는 한효주가 이 연속극에서 가장 어색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한효주는 아들을 키워 본 적이 없고 겉보기에도 억척 엄마보다는 시집 안 간 막내 이모 같다.

 아마도 여건이 허락됐다면 한효주는 이런 약점들을 극복하기 위해 배우로서 나름대로 어머니 역을 연구하고 자신을 바꾸는 데 도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만한 자유는 없었을 것이고, 원작자가 쓴 만화 말주머니 속에나 있을 법한 대사를 때론 도덕적 순수에 흠뻑 젖어, 때론 웃어주는 사람 하나 없어도 홀로 즐거운 명랑소녀처럼 따따따 읊어야 했을 것이다.

 배우들의 해맑고 순박한 미소와 황송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당혹스러움에서 강풀 원작이 연속극을 얼마나 강하고 기계적으로 조이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살아 있는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의 세부라는 영화 매체의 특징이 마치 치과 기구에 의해 고정된 입처럼 딱딱하게 굳어 공산품으로 출시된 것 같다.

 

 재밌는 점도 있었다.

 원작 만화에서는 자세히 묘사할 수 없었던 폭력이 자세히 표현되어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머리가 터져 뇌수가 흘러 나오고 목이 꺾이고 욕지거릴 하면서 일진을 묵사발로 만들고 총알이 몸에 박히고 머리에 미용 가위가 꽂히는 따위 잔혹한 폭력은, 인물의 감정이 영화적 생기를 잃은 것과 달리 강렬한 외설적 쾌감을 안겨준다.

 무빙이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주제 의식인 강풀식 샤랄라 공감 능력의 뒤통수가 바로 이 찌르고 베고 터지는 피투성이 폭력이다.

 그리고 이 경우엔 억지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보다 뒤통수가 볼 만하다.

 

 외설 얘기를 한 김에 한 가지 짓궂은 감상을 더 추가한다.

 너무 뻔해서 남들도 다 했을 법한 생각이니까 상세히 부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김봉석 역으로 나온 이정하는 정말 강풀 만화에 나올 법한 순진무구한 바보 온달 미소를 재현하지만 원작 만화를 볼 때는 전혀 들지 않았던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감정이 동하면 공중에 뜬다는 설명을 성기가 발기하면 뜬다는 의미의 완곡어법으로 이해해 보면 어떨까.

 한창때 나이 남자애가 예쁜 여자애의 몸이 닿으면 고개를 숙이며 안절부절 못하고 원주율 소수점을 왼다?

 샤워기 물을 맞으며 공중에 뜨는 장면이나 꿈속에서 하늘 높이 치솟는 장면은 거의 변강쇠에서나 보던 사정(射精) 완곡어법과 딱 맞아떨어진다.

 적어도 한국 연속극에서는 결코 실현될 리 없는 내 제안은, 이런 의도치 않은 뉘앙스를 모른 척하지 말고 아예 그쪽으로 길을 내 보라는 것이다.

 경직된 만화형 인물을 떨쳐버리고 실제 고3이 초능력을 갖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먼저 박찬욱의 박쥐에 나온 바 있듯이 그들은 마음껏 능력을 분출해 보고 싶을 것이다.

 아마도 그 다음은 각자의 능력을 인터넷에 과시해 유명해지고 싶겠지만 줄거리상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두 외로운 초능력자 학생이 서로에게 끌린다면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체육관에서 교회 첨탑 위에서 구름 너머에서 실컷 섹스를 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나.

 초능력이 있는 고3이라면 으레 자아가 초비대해질 것이고 가정이나 사회의 규범이 그들의 성적 욕망을 옭아매지 못할 것이다.

 무슨 어린애들 알몸을 보여줄 필요는 없다.

 샤워기 밀대 화산 파도 전구 들썩이는 교실 천장의 형광등 같은 변강쇠식 우회로 충분히 표현하고도 남는다.

 

 무빙에 투자한 디즈니 플러스는 내부 평가가 다 끝났는지 다른 강풀 원작으로 유니버스를 확장할 계획 없이 한국에서 철수한다고 한다.

 언론은 다들 무슨 K 어쩌고 하면서 한국 문화 상품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얘기하는데, 내가 보기엔 오징어게임의 성공은 안 그래도 몰락하고 있던 한국 영화 산업이 공룡 기업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신호탄이었다. 하나의 매우 전형적인 분류 아래로, #Korean 태그로 묶여 거대 자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상품을 생산하는 데 모든 인력과 문화 자원을 투입하는 체제로 바뀌는 중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와 비스티 보이즈를 만들었던 윤종빈은 이제 이전 작품의 흥행 요소를 답습해 제국 OTT에 납품한다.

 무빙의 문제도 같은 것이면서 결과는 더 안 좋다.

 연속극을 보고 있자니 노트북 앞에서 때론 싱글거리며 때론 울상 지으며 각본을 썼을 강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에게 신파 감성은 자기 안에 있는 진심 어린 감정이었을 것이다.

 이것 봐. 우리 곁의 소시민은 선하잖아! 감동이야!

 웹툰 매체에서는 그 감성이 어느 정도 통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는 완전히 다른 매체고 새로운 창작이 필요하다.

 영화에 대한 감각이 없는 각본가에게 의존하지 말고 영화 매체에 맞는 영상 언어로 재구성해야 한다.

 그러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이 기획이 너무 큰 자본이 투입된 제국 기업의 상품이었다는 점이다.

 영화 작가에게 맡겨서 재창작의 모험을 시도하는 게 아니라 이미 상품성이 확인된 원작을 재현해 K스러운 수출품을 만드는 데 모든 인력과 자원이 투자되다 보니 원작자인 각본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원작은 만화였기 때문에 용인되는 점들이 있어 독창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예컨대 담백한 그림체로 그린 그림에 불과한 고3 김봉석의 순수를 누가 의심하겠는가.

 검토 없이 그대로 영화가 되자 김봉석은 바보가 되었다.

 

 

 

쿵푸 허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