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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럽고 신성한 결혼

 

 거창하게 말해서 한국 영화의 희망을 엿봤다.

 유재선의 잠은 말하기 어려울 정도의 모순에 이른다.

 칭찬에 앞서 몇 가지 아쉬운 점을 말하자면 영화가 전체적으로 유려하지는 않았다.

 집 안이라는 장소를 흥미롭게 재구성하거나

 갓난아이라는 현재적 존재, 즉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며 모든 것을 현재화하는 특수한 중력의 도전도 수락하지 못했다.

 모든 일의 중심에 아기가 있음에도 아기의 현재성을 영화 미디어로 노출하지 않아서 이 영화의 다른 현실은 은폐된다.

 이에 관한 해석은 마지막에 덧붙일 수 있을 것 같다.

 과감한 생략은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영화를 파편적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피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 때론 진득히 집중해 밀고 나가야 나중에 과감히 생략할 때 관객들도 함께 벼랑 위에서 도약할 수 있다.

 또는 완전히 반대 전략으로, 영화가 이야기를 대놓고 앞지르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가령, 셋으로 나뉜 각 장마다 아예 노골적인 제목을 붙이는 것이다.

 제 1장 아내가 일어나 잠든 남편을 본다

 제 2장 개가 사라진 자리에 아이가 생긴다

 제 3장 모든 일이 해결돼 행복하게 끝난다

 이런 식으로.

 음험한 술수를 부려 관객을 농락한다는 느낌을 줘서 파편화된 구성일수록 더 어울린다.

 이 모든 단점은 이 영화가 철저히 각본에 의지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막상 영화를 찍기 시작할 때 드러나는 여러 의문점과 가능성을 유재선은 간단히 무시하고 그냥 진행해 버렸다.

 그럼으로써 카프카 단편 같은 기이한 분위기와 현실성이 교환된다.

 한편 내가 감동한 부분도 그 각본에 있다.

 마지막 남편의 이상 행동이 빙의인지 연기인지 부연하지 않음으로써 잠은 매듭을 존재론적 차원으로 넘긴다.

 물론, 관객을 믿는 김에 조금 더 믿어서 아내의 눈동자에 사랑과 영혼 패러디 같은 천도가 비치지 않았더라면 더 확실하게 불확실한 매듭이었을 것이다.

 매듭이 불확실한 만큼 영화를 구성하는 세계의 속성도 모호해지고, 따라서 영화가 어떤 이데올로기를 채택하고 있는지도 불분명해진다.

 심지어 연기와 빙의 둘 다 동시에 일어났을 수도 있고 그걸 남편이 모를 수도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아내에게 어떤 의식이 필요했다는 점이다.

 양립하기 어려운 것들을 유지하기 위해, 오래된 이데올로기를 소환해 경유했다는 점이 이 영화의 아이러니다.

 아내는 아버지 없이 자랐지만 아버지는 사라짐으로써 상징적으로 더 강한 힘을 행사한다.

 한밤중에 일어나 사랑하는 개를 산채로 잡아먹는 남자와는 함께 살 수 없다.

 갓 태어난 아이가 있다면 그것은 더더욱 안 될 일이다.

 그 불가능한 임무를 감당케 하는 아내의 결혼 이데올로기는 사라진 아버지의 법과 붙어 있다.

 그리고 이 부분이 정말 기이한데, 사라진 아버지는 아래층 할아버지로서 돌아오고 있다.

 즉, 아내에게는 지켜내야 할 것과 몰아내야 할 것이 같다는 모순이 주어진다.

 이 접합부를 때워주는 것이 바로 어머니가 불러온 무당의 설명이다.

 무당은 일종의 유사 어머니처럼 작동하는데, 그렇게 본다면 어머니의 입장이라는 게 어색하다.

 어머니는 딸에게 이혼을 권유하는데 이것이 혼자 아이를 키워본 어머니가 쉽게 꺼낼 수 있는 얘기일까.

 복지가 잘 돼 있는 나라에서도 혼자 아이를 키우는 일은 만만찮다.

 하물며 한국에서 온갖 차별과 불리를 견디고 아이를 키운 사람이 이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혼이라는 멀쩡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의아하며 또한 그런 자신감과 용기가 있는 사람이 위태한 결혼을 치유하려고 무당에게 의지하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 인물은 대충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혼을 권유할 게 아니라 딸의 고통 앞에서 아무말 없이 침묵해야 이후 딸에게 광적인 결혼 이데올로기가 상속된 진상에 일관성이 생긴다.

 유재선은 히치콕 영화에 비할 만한 그럴듯한 구도를 다 갖춰 놓고 정작 그 강렬한 억양을 살리지 못했다.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딸의 광기와 사회적 억압이 연결되고 공개되는 구체적 현장인데, 어머니는 건성으로 그려졌고 딸은 배우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방점이 찍혔다.

 어머니로부터 딸에게 전해진 결혼 이데올로기의 서사는 바로 부재한 주체를 소환하는 빙의에서 나온다.

 어머니는 남편 없이 아이를 키웠지만 남편은 사라진 채로 가정의 중핵이 됐다.

 어머니는 아마도 아버지의 역할까지 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역할이 요구될 때 어머니는 자신의 빈 곳에 아버지를 소환해 아버지로서 말하고 행위했을 것이다.

 딸에게 아버지로서 역할했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 자신도 그런 남편/아버지 모드에 기댔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정을 존속시켜 주는 사라진 아버지는 왜 다시 쫓겨날 흉측한 모습으로 귀환했고, 동시에 왜 다시 부재한 목소리로 불려와 자신을 몰아내는가?

 그것은 애초에 아버지라는 존재의 이중적 성격 때문이다.

 아버지는 사회의 명령에 따라 인자하고 엄하며 불굴의 의지로 가족을 책임지면서도 위기에 봉착하면 단호하게 가족의 운명을 결정해야 하는 충직한 대리자인 동시에 살아 냄새를 풍기고 욕망에 취약한 하찮은 남정네기도 하다.

 전자는 가정을 유지시키지만 후자는 가정을 깨는 데 선수다.

 이렇게 본다면 분명해지는 점이 있다.

 남편의 심각한 몽유병 증세는 이데올로기가 억압한 결혼의 외설성이다.

 그것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경우에도 암시되는 바처럼 배우자의 외도일 수도 있고 어떤 변태적 습성일 수도 있으며 네이트 판에 인기 썰로 올라올 법한 시월드의 다종다양한 천박함일 수도 있다. 어쩌면 층간 소음 갈등이라는 삶의 자질구레한 불편까지 여기에 더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것은 결혼 이데올로기를 위협하는 균열로 애초부터 결혼에 동봉돼 있었다.

 결혼을 존속시키기 위해 불려온 부재한 아버지가, 게걸스레 결혼을 먹어치우는 아버지를 축귀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상징적인 아버지는 실제로 존재하는 하찮은 남자를 쫓아내야 한다.

 그래야 그의 아이를 낳고 미래를 바라보며 결혼을 이어갈 수 있다.

 이때 후자의 육신은 무당의 담화 속에서 의식으로 몰아낼 수 있는 비물질적인 혼으로 간주된다.

 정신분석적으로, 아내의 투쟁은 페티시(부적)에 불과한 자기 위안에 그친다.

 의식을 거쳤다고 하더라도 육신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남편은 촬영 현장에서 예쁜 배우들에 둘러싸여 유혹받을 것이며 아내도 여러 삶의 문제에서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

 광기 어린 의식이 벌어진 막다른 골목의 퇴행은 우리 젊은 세대의 정치적 퇴행을 연상시킨다.

 세상이 급격히 변하고 여러 위기들이 발생해 그 근본적인 전제들을 의심하고 새로운 정치를 호출해야 할 때에 한국 사회의 젊은이들은 '과거의 좋은 정치', 즉 좋은 아버지로 나쁜 아버지를 몰아내는 의식에 광기 어린 집착을 했다.

 지난 대선에서 각각 국힘과 민주당을 지지했던 젊은 남녀는 그들의 새로운 정치를 만들지 못하고 퇴행적인 문법 속에 갇혀 서로를 축귀하는 의식에 악다구니를 썼고 그 의식은 대선이 끝난 지 1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이어진다.

 위험에 실질적으로 대항할 방도를 찾을 생각도 하지 못해 부적과 의식에 목매달고 다시 위험에 노출되는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 현재 우리의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잘 들리지 않는 아기 울음 소리에 대한 분석이다.

 여자가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은 미디어가, 즉 상징적 아버지가 주로 밝고 아름다운 면만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 자체로 불안하고 괴로울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압력 사이에서 겪는 갈등도 상당할 것이다.

 직책이 팀장인 걸 보니, 그리고 부푼 배를 안고 밤 늦게까지 일을 하는 걸 보니 1-2년 대충 다닌 회사 같지는 않다.

 게다가 배우자는 정년이 보장됐거나 소위 안정적인 직업이 아니므로 생계의 중심, 가장은 자신이다.

 출산하기 위해 회사를 나올 때 여자는 이미 그 결정만으로도 온갖 생각이 다 들었을 것이다.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의 벌이까지 함께 안 좋아지는 나쁜 상황에 대해서도 상상했을 것이다.

 상상하지 못했더라도 언어화되지 못한 예감으로나마 느꼈을 것이다.

 여자들이 흔히 겪는 산후우울증, 이제 여자로서는 끝났고 평생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젖소로 살며 부풀다가 녹아내릴 거라는 악몽 따위의 스트레스는 아주 간단한 숏, 몽타주들로 표현 가능하다.

 그중에 무엇보다도 가장 효과적인 것은 아이 울음 소리다.

 이 시끄러운 소리는 모든 사람을 현재로 집중하게 하는 강력한 중력이면서도, 이를 외면하는 순간 온갖 나쁜 가능성을 드러내는 경계의 통고다.

 가령, 클로즈업된 아기가 5초 동안 우는 숏이 있다면 관객은 누가 얼른 달려와 달래지 않는지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릴 것이며 그 희망이 기우는 만큼 나쁜 상상을 하게 마련이다.

 영화에서 실질적인 육아와 그에 관련된 여러 삶의 문제는 시끄러운 아기 울음 소리와 함께 볼륨이 크게 줄었다.

 만약 이런 부분이 충분히 표현됐다면 아내가 그저 까닭 없이 발광하는 미친년으로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미칠 만한 이유의 뿌리들이 집 밖의 흙 속에 단단히 박혀 있음을 보여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