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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호정과 정의당

 

 류호정이 결국 탈당했다.

 요 며칠 간 시사 프로그램이나 뉴스 대담 코너를 보면 류호정 얘기가 빠지지 않았다. 국힘과 민주당에서 탈당하는 정치인들 얘기를 하다가도 말미에 꼭 류호정 얘기가 붙었다.

 얼마 전에는 정의당 비대위원장 김준우가 비례 대표 1번인 류호정 공천을 사과했다.

 책임 있는 주체라면 관리 불가능한 일에 대해서도 사과할 수 있다.

 예컨대 대통령은 예측불가능한 천재지변에 피해 입은 주민에게 사과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다른 인터뷰에서 나온 그의 말에 따르면) 상징성 있다는 비례 대표 1번의 이탈에 대해 당원들에게 사과할 수 있는 것 같다.

 즉, 정의당을 지지해 주고 선택해 준 시민에게 사과한다는 대목까지는 납득된다.

 그 다음 대목이 사과의 성격을 바꿨다.

 김준우는 비례 대표 후보 검증과 재발 방지 대책을 약속했다.

 소속 의원이, 당을 해체하고 새로 당을 만들자고 주장할지 안 할지, 당이 정치적 고착 상태라고 판단될 때 다른 당을 만들면서도 기존 당적을 유지할지 안 할지 어떻게 판별한다는 것일까.

 계약서라도 받아낼 것인가?

 일테면, 너무 키가 커서 죄송합니다, 같은 말은 진짜 사과가 아니라 다른 의미다.

 김준우의 사과는 사과를 빙자한 인신 공격이다.

 이런 글러먹은 인간을 공천한 데 대해 당대표로서 사과합니다

 정의당 입장에서는 물론 서운한 마음을 표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유치한 방식이어야 하는가.

 MBC와 JTBC 등을 포함한 언론 역시 관성적으로 류호정을 맹폭했다.

 예컨대 4년 간 비례 대표 1번으로서 특혜를 받았다는 식의 일방적인 인용 보도나 카톡 방에서 강퇴당했다는 중학생 뒷담화 수준의 보도는, 주요 언론이 오랫동안 여의도 정치권과 소통하며 그들의 윤리를 고착시켰음을 다시 한번 보여줬다.

 

 정의당의 정치가 실패한 이유가 무엇인가.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미운털이 박힌 이유가 무엇인가.

 진중권 말마따나 조국을 묵인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민주당 열성 지지자들 말대로 이재명을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다들 쉽게 생각하고 싶은 바처럼 이른바 '극단 페미' 때문인가.

 모두 일리는 있으되 작은 핑계다.

 우리 당이 실패한 이유는 조국을 묵인했기 때문이요, 라고 반성한다면 딱한 일일 것이다.

 양당의 이익 앞에서 6석으로 쪼그라든 정의당에 한계는 명확했을 테지만 소수라면 오히려 조화와 협력을 구사하기에 유리하다.

 임기 내내 독대 한 번이나 했을까 싶은 의원들끼리 패를 갈라 전갈의 독을 품고 적대하는 거대 양당의 내분을 보라.

 하지만 어떤 사정으로 인해 정의당은 색다른 정치를 보여주지 못했다.

 내부자가 아닌 이상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이것이 외부에서 관찰할 수 있는 정의당의 실패 원인이다.

 정의당의 정치는 양당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으리으리한 대궐 두 채 옆에 미니어처를 세운 뒤 퍽이나 다른 척 연기했을 뿐이다.

 아마도 정의당의 자랑이며 자부심인 당원 민주주의가 실은 쭉정이고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정의당의 입장이 궁금하지 않은 지 꽤 됐다.

 정의당의 입장은 경직돼 있거나 뻔하거나 어수선하다.

 어떤 이들은 윤리성 회복에서 재기의 실마리를 보는듯하다.

 내 생각엔 엘리트 정치 밖에서 대안적 소통법을 찾는 게 큰 과제다.

 채팅창을 열면 온갖 구호가 일 초에 백 건씩 쏟아지고 페이스북과 X에 방어적 집을 짓고 전선을 긋는 시대에 엘리트 정치 외부에서 어떤 정치적 모델을 구상할 수 있을까.

 거기에 대한 방안을 내놓는 게 진보 정치가 지금 해야 할 일이다.

 어떻게 우리가 함께할 것인지, 어떻게 함께 더 나은 방향을 위해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지.

 류호정이 선택한 길이 좋은지 나쁜지 판단할 수 없다.

 다만 류호정의 길과 김준우의 길을 비교하면 김준우의 길은 기존 양당 정치 흉내를 계속하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양당을 수렁으로 빠뜨렸다는 팬덤 정치의 핵심적인 문제는 뭘까.

 팬이 야구팀 롯데 자이언츠를 응원하는 직접적 실리는 없다.

 자이언츠가 우승한다고 해서 노동 조건과 월급이 상향되거나 사회적 폭력이 감소하지 않는다.

 반대로 자이언츠가 10연패를 한들 팬 자신과 사회에 끼치는 직접적인 해악은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팬은 시간과 돈 같은 자원을 쏟아가며 야구팀을 응원하고, 따라서 결과적으로 팬이 원하는 정체성 공유와 직접적 실리는 교환된다.

 이 페티시가 미디어 변화를 타고 중앙 정치와 유권자 사이에 자리잡은 게 바로 팬덤 정치다.

 정당의 역할 중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은 팬-유권자에게 정체성을 제공하는 일이 됐다.

 수단에 불과한 정당은 분당하든 합당하든 해당하든 정치적 실리라는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지만 정체성에 과몰입된 팬 문화가 강해지면서 목적과 수단은 전도된다.

 김준우가 각종 방송 인터뷰 등에서 얘기한 정의당에 한 표 줘야 할 이유라는 것이 노동 녹색 평등이라면, 드는 반문은 언제는 아니었냐는 것이다.

 오늘 아침 시사 라디오 방송에 출연한 김준우는 가덕도 신공항을 반대하는 이들은 정의당뿐이라고 하며 기후를 생각하는 시민이라면 정의당에 투표하라고 홍보했다.

 그것이 정의당이 제공하는 정체성의 미덕 과시(Virtue Signaling)다.

 그들은 가덕도 신공항 건설을 정말 반대하고 있는가? 아니면 반대한다는 미덕을 과시할 뿐인가?

 중요한 것은 가덕도 신공항으로 인해 발생할 여러 가지 환경 파괴를 얼마나 막거나 줄일 수 있느냐는 실리지 그것에 반대한다는 정체성이 아니다.

 정의당이 표를 더 얻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설사 표를 많이 얻지 못하더라도 가덕도 신공항의 폐해, 반대 논리를 전국민적으로 공유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거나, 너무나 여론이 막강해 막을 수 없다고 한다면 건설로 인한 오염을 어떻게 최소화할 것인지 실질적인 행동 방침을 내놓아야 한다.

 녹색당과 결성한 선거 연합도 정치적 실리와는 무관한 정체성 수집에 지나지 않는다. 정의당을 지지하다 돌아선 유권자가 녹색이라는 신호에 반색하고 유턴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정의당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는 노동 녹색 평등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표시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정체성을 지탱할 만한 정치적 역량이 없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고고하게 좌절하는 정체성을 팔지 말고 우리 앞에 실제 닥친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정치적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

 절대 다수의 유권자는 한국 정치의 강고한 체제 앞에 무력감을 느낀다.

 그 무력감이 바로 파시즘적 팬덤 정치를 유도하고 관성적인 정치 혐오를 유발한다.

 

 소통은 어떻게 보면 정체성, 즉 동일성(Identity)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소통하려면 정체성을 느슨하게 흘려 보낼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정의당의 기이할 정도로 배타적인 정체성을 넘어서려는 조성주, 류호정, 박원석 등의 시도는 주목할 만하다.

 다만, 류호정이 탈당의 변에서 정의당을 가리켜 민주당 2중대라고 폄훼한 것도 같은 문제가 있다.

 정의당이 그 자리에 안주하려는 이유는 과거에 소수 정예의 민주당 2중대로서 한국 정치의 무게 중심을 흔들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류호정이 금태섭 등과 한 배를 타고, 자신의 반대자들과 소통하기 위해 여성 징병 문제를 꺼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의당은 그 작은 몸으로 민주당 지지자들을 움직이기 위해 미묘한 관계를 형성한 역사가 있다.

 그것은 류호정이 이렇게 고깃덩이처럼 다뤄져야 할 이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쉽게 악마화돼선 안 될 진보 정치의 역사적 자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