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멀고 신 포도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평론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기에 보러 가려다가, 표값이 비싸니까 신중히 고르려고 엄태화 감독의 전작부터 확인했다.

 

 가려진 시간

 

 첫 장면에 담긴 바다의 수평선은 적잖은 야심을 드러내지만 영화 전반에 원근을 넘나드는 시는 없다.

 수십 년 동안 한국 영화가 그래왔듯이 울부짖는 클로즈업에 온 힘과 기대를 거는 육박전이다.

 인물이 진부하고 평평하며 특히 아이들은 스마트폰을 든 90년대 초딩 같다.

 미로를 구성할 수도 있었을 플롯은 플래시백으로 일축되었다.

 

 흥미로운 구석도 있었다.

 

 1. 김희원이 연기한 새아빠는 이런 장르에 으레 기대되는 헌신적 아버지상을 적극적으로 재현하려는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그나마도 어색한 라면 장면 전까지 아빠는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자기에게 부여된 보호자 역할을 걷어차고 궤도를 이탈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불러일으킬 만큼 희미하게 그려졌다. 조금 더 나아가 보자. 남자 주인공은 고아고 여자 주인공도 스스로 고아로 여긴다. 단지 극중 무대인 섬마을로 이사 오면서도 동시에 그 섬에서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관리하지 않기 위해 새아빠가 필요했을 것이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가족의 신뢰 회복 같은 것이 본격적으로 연출되지는 않는다. 할리우드 영화처럼 얼싸안고 이마에 입을 맞추고 하는 장면 따윈 없다. 부모와 아이 사이의 연결고리는 일부러 약화되어 있다. 어쩌면 이것이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점일지도 모른다. 새아빠가 터널 공사를 하며 터뜨리는 폭약은 이 영화에서 시적인 여운을 남기는 드문 장치다. 폭약/폭음이 부모와 아이를 떼어놓았다가 종국에 할리우드 영화처럼 끈끈하게 재결합시키는 게 아니라 그 관계 파탄의 여진을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어간다.

 

 

 2. 이와 관련해서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이 있다. 가려진 시간의 산업적 선배 모델은 늑대소년일 것이다. 소녀와 아름다운 국외자 소년, 모글리의 비밀스러운 만남. 엄태화의 예술적 비전과 별개로 강동원이라는 미남 배우와 어린 소녀가 비밀을 공유하고 속삭인다는 것이 산업적 타당성의 근간일 것이다. 남매의 집을 만들었던 조성희가 주류 시장에 길을 낼 수 있었던 것도 그 타당성 덕분이었을 것이다. 차이라면, 당시의 송중기와 비교해 강동원이 너무 나이들어 보인다는 점이다. 강동원의 클로즈업은 더 이상 늑대의 유혹에서 우산 속으로 들어온 소년처럼 해맑지 않다. 그는 스무살 언저리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수염만 밀었다면 엄태구가 차라리 그럴듯했을 것이다. 두 소년소녀의 재회는 그다지 로맨틱해 보이지도 않는다. 강동원의 부리부리한 눈은 오히려 어딘가 불길하고 무섭다. 엄태화가 이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진 않았다. 어떻게든 로맨틱하게 꾸미려고 했다. 강동원을 순수한 레옹처럼 만들기 위해 애썼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사용된 시간 요괴 마법이 나는 신은수에게만 작용해 두 성인 남녀의 재회로 이어질 줄 알았다. (강소라를 예상했다) 예상은 빗나갔다. 강동원은 자기 실제 나이에 더 가까워졌고 신은수는 그대로 남아 나이 차가 더 벌어졌다. 이때 신은수를 중심으로 한 인물 구도는 좀 이상하다. 이것이 아빠와 얼싸안고 할리우드식 가족 재결합을 성사시킬 수 없었던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신은수에겐 이제 아빠가 둘이다. 새아빠와 키다리 아저씨. 그리고 두 아빠는 모두 딸과 거리감이 있다. 새아빠와 달리 키다리 아저씨는 간절히 가까워지고 싶지만 사회적인 사정 때문에 멀어졌다는 설정이다. 하지만 섬 바깥 어딘가에서 키다리 아저씨와 몰래 재회하는 신은수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찜찜하다. 어린아이 간의 순수한 관심 단계를 넘어 두 남녀의 성적 결합이라는 걸림돌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목성처럼 차가운 새아빠와, 뜨겁지만 먼 곳에서 공전하는 혜성 같은 키다리 아저씨는 저마다 제자리를 찾아간 것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불길한 여운을 남긴다. 소녀는 위험하고 외롭다. 왜 여자 친구 하나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