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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전된 오발탄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잠깐 얘기하고 넘어가자.

 1부 마지막에 카메라는 바다로 나아가는 영희에게서 눈 돌려 오른쪽 독일 부부 쪽을 쳐다보다가 다시 영희가 있던 자리로 돌아오는데 거기에 영희는 없고 바다만 펼쳐져 있다. 반대편인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검정 옷 남자가 의식을 잃은 듯한 영희를 들쳐메고 해안가를 따라 멀어진다.

 이 황당한 광경은 양자 택일로 구성된 진정성의 문답에서 도주함으로써 진정성의 세계를 와해하거나 또는 적어도 유예하는 만답이다.

 일테면, "사랑 아니면 죽음을!" 같은 양자 택일은 사랑에 대한 진정성을 담보하며 즉각적인 행동을 부른다.

 하지만 "사랑 아니면 죽음이나 저금을!" 로 고치면 행동과 구호 사이에 망설일 공간이 생기며 사랑과 죽음 사이의 다른 가능성들을 비춘다.

 이 장면에서 모든 것은 불분명해져서 분명한지 불분명한지도 불분명해진다.

 그때 내가 느꼈던 절박하고 아슬한 감동은, 그 양자 택일을 피하는 논리에 따라 청승으로 위치 지어질 수도 있다. 

 이 영화에 대해 생각해 본 모두가 그렇겠지만 나도 이 영화를 명쾌하게 설명할 방법을 모른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보고 문득 이 영화가 떠올랐지만 모호한 결말이 이처럼 말이 다가가지 못해 애가 닳는 느낌은 아니어서 한번 억지로라도 설명해 보려고 한다.

 

 위 장면과 달리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마지막 장면엔 다른 모든 장면들을 싱크대 배수구처럼 빨아들이는 강력한 중력이 있다.

 영화의 나머지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 양자 택일 구도로 재편하는 중압의 영향권에 든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검은 옷 남자나 오 수정의 부정교합과 달리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의 나머지와 동렬에 놓을 수 없다.

 이 마지막 장면은 앞 장면들에 대한 선고고, 진면목인 미스터리다.

 

 미스터리를 풀기 위한 단초는 카메라의 기계성이다.

 여기서 기계성이란, 매순간 달라지는 자극과 정보에 개의치 않고 이미 결정된 단순한 움직임을 그저 시행하는 성질이다.

 이 경우엔 특별히 트래킹에서 그 성질이 두드러진다.

 처음에 카메라는 앙각으로 숲우듬지를 바라보며 가로지른다.

 그 다음 숏에 바로 타쿠미의 딸 하나가 있다.

 이 문답의 논리는 거듭 반복된다.

 타쿠미가 뒤늦게 유치원에 하나를 데리러 갔을 때도 카메라는 아이들의 신호등(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수평 트래킹으로 훑는다.

 그러나 하나는 거기 없어서 기계적 움직임이 기대하는 답의 개연성에 의심이 더해진다.

 하나를 찾으러 다시 유치원을 떠날 때 카메라는 차 뒤꽁무니에 달려 있는데 이 역시 기계성이다.

 즉, 하나가 없다고 카메라는 두리번거리거나 여러 면으로 쪼개지지 않고 기시행된 바 있는 단순한 움직임을 재시행할 뿐이다.

 타쿠미가 숲으로 들어갔을 때 포트 다(fort-da 있다 없다) 놀이는 비로소 낯익은 답을 얻는다.

 그러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기대값의 안정성이 파탄난다.

 이것은 마치 각기 다른 컨베이어 벨트 위를 달리던 물건들이 서로 충돌하고 뒤엉킨 사태와 비슷하다.

 그 컨베이어 벨트의 작업 내용들, 알고리즘은 다음과 같다.

 1. 숲속을 가로지르면 하나가 나오기로 돼 있다.

 2. 사슴은 총에 맞았거나 새끼가 총에 맞았을 때 인간을 공격하기로 돼 있다.

 하지만 이 각기 다른 벨트가 중첩되고 합선되면서 숲속을 가로지르자 하나가 아닌 피 맺힌 나무 가시가 나오고 인간인 타쿠미가 옆에 있던 남자를 공격한다.

 이 과정에서 카메라는 기계적 오류를 겪듯 여러 조각으로 쪼개져 오신호를 송출한다. 다시 말해, 진상이 아닌 몇 컷으로 나뉜다.

 수미상관으로, 그러나 이번에는 어두컴컴한 하늘 아래 반복되는 앙각 트래킹은, 이미 고장나 연기를 뿜으면서도 같은 결과를 내기 위해, 하나를 보기 위해 시행되는 기계의 움직임이다.

 

 영화 속에서 기계의 슬픔 또는 기계의 처연함에 대비되는 것은 아마도 연예기획사 모니터 안에서 회의하던 사람들의 확신일 것이다.

 그들은 분명히 보이지만 단지 보일 뿐이다.

 반면 마지막 안개 낀 장면에서 타쿠미와 하나는 그 존재감이 흔들리고 끝내 컴컴한 숲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지만 오히려 오작동한 흔적으로서 거대한 자연의 존재감과 동화된다.

 숲속 환경음과 숨소리는 하나가 된다.

 여기에는 어떤 분명한 이분법이 배경으로 드리워져 있다.

 헤게모니는 탐욕스럽고 교활하며 자연은 무심하고 우직하다.

 그 사이에서 인간은 고통받는다.

 모노노케 히메와 다르지 않은 세계관이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마지막 장면도 그 영화와 마찬가지로 양자 택일로 설정된 구도에서 어떤 비장미를 길어올린다.

 균형 아니면 파국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