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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무기력

 

 

Incompetent and dependent

 

 

 아이리시맨 이후에 만들어진 영화라 기대를 좀 했는데 영 엉뚱한 영화였다.

 시작할 때부터 끝나기 몇 분 전까지 대부분 지루했다.

 이야기가 지루하다기보다는 숏의 연결이 지루했다는 뜻이다.

 아무 이야기 아니더라도 연출/편집에서 도약하는 게 영화다.

 설명조의 평범한 편집으로는 연쇄살인마들끼리 우연히 핵발전소에서 마주쳐 대결하는 얘기를 하더라도 지루하기 마련이다.

 하고 싶은 말을 위해 용맹히 나아가던 아이리시맨과 달리 이 영화는 상영 시간만 비슷할 뿐 매우 조심스럽다.

 거의 어떤 예술적 시도도 하지 않고 TV 영화처럼 설명만 한다.

 물론, 조급하지 않게 차근차근 설명해서 나중 법정 장면에서 어니스트가 그냥 진술만 하는데도 상황이 다 이해되는 것은 장점이다.

 하지만 내가 영화에 기대하는 것은 전말을 잘 설명해 주는 게 아니다.

 그런 걸 바란다면 관련 보고서를 찾아 읽는 게 오세이지족이 겪었던 일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 효율적일 것이다.

 영화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공백의 탄력을 억누른다는 모순이 이 영화의 기묘한 태도다.

 스콜세시는 이 오세이지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을 것이다.

 여러 가지 흥미 요소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심층적인 재미는 어니스트의 충성심에 있다.

 그는 삼촌 킹에게 충성하나 아내 몰리에게 충성하나.

 그의 마음은 어디에 있나. 영화 내내 나를 비롯한 관객은 거기에 관심이 있었을 텐데 스콜세시는 어니스트를 고뇌하는 자로 묘사하길 주저한다.

 배신하는 남자는 스콜세시 평생의 주제였다.

 이때 방점이 찍히는 것은 배신 그 자체가 아니라 배신이라는 변심, 즉 정체성 이동을 겪으면서도 유지되는 진심이다.

 이 영화의 경우에 스콜세시의 눈에 가장 먼저 띌 만한 예술적 과제는 어니스트가 몰리를 독극물에 중독시키면서도 사랑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는 정반대로, 몰리는 남편이 자길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를 여전히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이때 그 주장이라 함은 단순히 카메라에 대고 말하는 게 아니라 영화적으로 매우 섬세한 어떤 제스처다.

 이전 작품인 아이리시맨의 가장 큰 울림도 그런 자기 고백이었다.

 자신의 은인이자 가장 친한 친구를 죽이면서도 진심을 전하고 싶다는 뻔뻔한 주장이 조금 열린 문을 통해 새어 나온다.

 모 유튜버는 도입부의 복도 롱테이크가 스콜세시가 자기 전작을 스스로 인용한 거라고 해석하던데 그런 게 아니라 대비를 이용해 모순점을 드러내는 자기 고백적 어법이다.

 영화는 근본적으로 누구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그걸 가장 잘 보여준 감독이 장 뤽 고다르다. 끊고 점프하고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여기서 나타났다 저기서 사라졌다 흉내내고 반복한다.

 스콜세시는 아이리시맨에서 한편으로 현란하게 시점을 오가는 편집과 특수 효과로 자유를 누리면서, 즉 제멋대로 배신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내레이션, 목소리로 자신을 제출한다.

 복도를 따라 지속되던 롱테이크는 과거의 이야기로 갈 수 없다.

 얼마든지 거짓을 말할 수 있는 얼굴에서 멈춰야 한다.

 플라워 킬링 문에서 이런 종류의 주장을 하는 데는 훨씬 더 높은 장벽이 있다.

 이 영화의 취지는 차별받고 박해받고 역사에서마저 지워질 뻔한 원주민의 고난사를 다시 불러와 미국의 원죄로 호명하고 미국 영화사 한쪽에 걸어두는 것이다.

 이 사회적 사명을 받은 위치에서 부부 사이의 가장 사적인 진심을 스콜세시의 예술적 비전 안으로 끌어와 주장하면 그것은 그 즉시 사회적 논평으로 부풀려질 수 있다.

 어니스트가 몰리를 독살하면서도 사랑했다고 주장하면 역사를 희석하는 변명이 될 수 있고

 몰리가 독살당하면서도 어니스트를 사랑했다고 주장하면 아무 자격도 없는 영화 따위가 핍박받은 소수자를 대신해 용서를 베푼다고 해석될 수 있다.

 이 제약이 바로 세 시간여에 걸친 조심스러움의 원인이다.

 방종과 고해, 모순 어법이라는 스콜세시의 예술적 양날개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접혀 있다.

 또한 여기에는 스콜세시라는 작가의 한계도 있다.

 비록 사회적 제약이 있을지언정 사랑하는 남녀의 동역학은 어느 정도 묘사할 수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여성에 이입하는 데 젬병이고 여성을 기능적 타자로만 써 온 스콜세시는 몰리가 어니스트와 한 침대를 쓰면서 느꼈을 복잡한 감정을 묘사하는 데 아무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몰리는 내레이션으로 부족을 대신해 그들이 당한 핍박을 고발하는 것 외엔 별다른 말도 없어서 생동감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맨 처음 몰리가 카메라에 대고 나는 금치산자(incompetent)입니다 말할 때 스콜세시의 마음은 편해졌을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그걸 원했을 것이다.

 릴리 글래드스턴은 나름대로 사명감을 갖고 이 역에 임했을 테지만 친족의 연이은 죽음에 절규하다가 독극물을 주입받아 땀을 흘리며 침대에 내내 누워 있어야 할 트랙에 갇힌 수동적 인물로는 연기를 통해 특별히 뭔가 반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스콜세시는 해 온 가락이 있는 만큼 어니스트와 킹의 관계에 훨씬 끌리고 부부 사이는 밍숭맹숭하게 그린다.

 독극물을 주입하면서도 껴안고 볼을 부비고 아이를 낳는 기이한 관계의 세부나 긴장감은 거의 그려지지 않는다.

 심지어 마지막 대면에서도 빛나는 것은 어니스트 쪽이지, 죽음을 무릅쓰고 한 세월 적과의 동침을 버텼는데도 아무말 없이 자리를 뜨는 몰리가 아니다.

 단순히 성별, 부부의 문제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세이지족이 몰리를 통해서 대변되는 한 오세이지족의 정치적 입장과 시선이랄 만한 것도 함께 누락된다.

 그들은 그냥 함께 모여서 의식을 치르는 것 외에 아이구아이구 걱정이나 하지 별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돈을 모아 로비를 하러 워싱턴 DC에 갔다면 그동안 뭔가 기민한 움직임과 조직이 있었을 테지만 어니스트나 킹과 달리 욕망을 갖고 있는 정치적 행위자로 그려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스콜세시가 그냥 물러서지 않는 장면에 끌렸다.

 그 라디오쇼 장면은 이런 얘기다.

 나는 이런 거 만드는 사람입니다. 악기와 도구들로 가짜 효과음을 만들고 배우를 써서 목소리를 연기하며 온갖 사건들을 드라마틱하게 과장합니다. 여러분은 나의 거짓 극장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내 모습과 내 목소리를 제출합니다. 여기에 내 진심이 있습니다. 이 모든 즐길 거리 속에서도 나는 진심을 전하고 싶습니다.

 위험한 사랑을 주장할 수 없는 처지가 되자 스콜세시는 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평범한 영화 구석에 찍힌 화인이다.